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라-왜 전쟁 (문단 편집) === [[백제]]-[[가야]]-[[왜국|왜]] 연합군과의 충돌 === 신라는 당시 [[근초고왕]]의 선정으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백제]]와도 잦은 충돌을 겪었다. 366년 3월 백제의 사신을 맞이하고 2년 뒤인 368년 봄에 백제에게 좋은 말 2필을 받는 등 초반에는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369년 3월에는 근초고왕이 사백(沙白), 개로(蓋盧) 및 장군 [[목라근자]], 사사노궤와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가야 7개국[* [[비지국|비자발]](창녕), [[금관국|남가라]](김해), [[탁기탄|탁국]](영산), [[안라국|안라]](함안), [[다라국|다라]](합천), [[탁순국|탁순]](창원), [[반파국|가라]](고령).]을 평정했다고 하는데, 이 시기에는 이미 신라가 백제 중심의 한반도 질서에 굴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의 이러한 굴복은 일시적이었을 뿐이었다. 373년, [[백제]] 독산성(禿山城)의 성주가 300여 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해 오자 내물 마립간은 그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이에 [[근초고왕]]이 "화친한 뜻에 어긋난다"며 도망한 백성을 돌려 보내기를 요청했으나, 내물 마립간은 "원래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으니 생각나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너희 백성이 편치 않음은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과인을 나무라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라 반문하며 백제 우위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382년에는 신라가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왜국]] 측에서 장군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보내어 신라를 침략하였는데, 이에 신라에서는 미인 2명을 단정하게 꾸며 항구에서 마중하여 [[미인계|소츠히코를 유혹]]하였다. 유혹에 넘어간 소츠히코는 도리어 백제 및 왜랑 긴밀한 관계에 있던 [[반파국]]을 공격하였고, 이 때문에 반파국왕 기본한기(己本旱岐)를 비롯한 [[가야]]의 왕실과 백성들[* 왕의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을 포함한다.]이 [[백제]]로 피난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결국 가야국왕의 누이 기전지(旣殿至)가 간청하자 [[백제]]의 장수 [[목라근자]]에 의해 반파국의 사직이 비로소 복권되었다. 이렇듯 신라는 [[백제]], [[가야]], [[왜국|왜]]로 구성된 동맹으로부터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처지에 놓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신라는 북방에서 전성기를 맞고 있던 [[고구려]]와의 관계를 보다 긴밀하게 하기 시작했다. 381년에는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아 사신 [[위두]]를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에 파견하였으며, 392년 1월에는 내물 마립간의 조카이자 고위 귀족인 [[실성 마립간|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볼모]]로 보내 관계 개선을 꾀하였다. 시간이 흘러 393년 5월, 왜군들은 신라를 다시금 침략하여 [[서라벌]]을 에워싼 채 닷새 동안 포위를 풀지 않았다. 이에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내물 마립간은 깊숙이 들어온 적들의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을 것이라며 [[농성|성문을 닫았다]]. 왜군이 퇴각하자 내물 마립간은 먼저 기병 200명을 보내 돌아가는 길을 막았고, 보병 1,000명을 보내 독산(獨山)[* 오늘날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신광면(포항)|신광면]] 토성리로 추정된다.]까지 추격하였다. 이윽고 왜군을 협격하여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